"객관적이다"라는 것이 가능한 말일까??
우리가 토론을 할 때, 혹은 언론이나 미디어를 접할 때 '객관적'이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어떠한 진영에 휩쓸리지 않고, 주관과 편견을 배제한 절대 중립적 입장을 말하는
'객관성'이 과연 실재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객관성과 사실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객관성'과 '사실'은 명확히 다르다는 사실이다.
"사자가 토끼를 잡아먹었다"가 사실이고, "사자가 토끼를 괴롭혔다"는 객관이다.
객관성의 사전적 의미는 제삼자의 시각, 보편, 타당성으로 요약할 수 있다.
똑같은 사실을 전달한다고 해도 바라보는 시각, 프레임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 있는
언론은 객관적 보도 자세를 유지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객관성'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할 수 없는 관념이 아닐까란 의문이 든다.
누군가는 "어떠한 논의에 상반되는 두 진영이 있을 때, 두 진영에 상관없는 제삼자의 시각이 객관적 시각을 제공한다"
라고 하겠지만, 결국 제삼자도 자신의 의견을 가지고 있기에 그의 의견도 상반된 두 스펙트럼 중
그의 의견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처음 접하는 논의가 있을지라도 그 논의를 받아들이는 사유의 과정 속에 과거의 접한 편향된 시각들이
개입될 여지가 충분히 있으며, 그런 개입이 있은 후에 바라보는 시각은 절대 객관적이라 볼 수 없다.
'객관적'이란 말은 편향이 최대한 배제된 상태이고, ~적이라는 표현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다양한 해석을 하나에 기준에 맞추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객관성'은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잠깐 생각만 해도 머리 아픈 이 포스트 모더니즘의 주된 문제의식은 나에게 있어서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난제이다.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을 수 있으니 뭐가 옳은지 판단하기 힘들어지기만 한다.
결국 오랜 고민 끝에 이를 정리해보기로 했다.
세 가지 가정을 해보자.
P1 : 객관적인 세계가 실재할 수는 있다.
P2 : 그러나 객관적인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결코 완벽할 수 없다.
P3 :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객관성에 대한 추구는 제한적인 범위 안에서라면 가능하다.
P1은 어느 정도 절대적으로 모두의 생각이 동일한 합의점이 존재한다는 주장
P2은 하지만 우리는 그 합의점이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른다는 주장
P3은 모두의 생각이 동일하다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다수의 사람들이 인정하는 합의점은 객관성을 가진다는 주장
즉 P2는 P1의 변론이라면, P3는 P2의 대안 정도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세 가지 가정을 뒷받침하는 요소로 관찰의 과소 결정성과 언어의 한계가 있다.
1) 관찰의 과소 결정성 (underdetermination)
어떤 현상 A가 서로 다른 이론들에 의해서 동시에 설명될 수 있을 때, 현상 A는 이론을 과소 결정한다고 한다.
즉 A에 대한 데이터가 있더라도, 그것이 여러 이론을 지지하는 증거로 활용될 수 있어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이 된다는 것이다.
일례로, 연소현상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에 대해 일었던 역사적 논쟁이 과소 결정성 문제를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과학혁명 당시에는 연소를 플로지스톤의 작용으로 이해하는 입장과 산소의 작용으로 이해하는 입장이 대립하고 있었는데, 당시까지 관찰된 결과들이 모두 두 이론에서 똑같이 잘 설명되었다. 결국 산소파의 승리로 끝나기는 했지만,
그 승리에는 산소 이론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라부아지에의 정치력이 적지 않게 작용했다고 한다.
데이터의 해석을 놓고 논쟁하는 과학에서도 상황이 이러한데,
각종 이해관계가 얽힌 정치 문제에 대한 서술이야 오죽할까.
이러한 이유로 관찰의 과소 결정성은 P2의 가정을 뒷받침한다.
2) 언어의 한계
우리가 아는 모든 것에 대한 서술은 언어로 이루어진다.
수학적 표현이나 프로그래밍 언어와 같이 엄밀한 논리적 체계를 갖춘 형식 언어를 이용하기도 하고,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인 자연언어를 이용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언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당한 한계가 있다.
우선 자연언어를 살펴보면, 우리가 명료하다고 생각하는 언어들조차도 거의 비유에 기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숫자가 크다/작다, 밀도가 높다/낮다와 같은 표현들을 사용하는데,
어떻게 추상적 개념인 숫자에 '크기'라는 속성이 있으며, 밀도에 '높이'라는 속성이 있겠는가?
이와 같이 자연언어는 은유로 가득 차 있으며, 필연적으로 애매모호함을 동반한다.
따라서 실재를 기술하는 데에도 이러한 애매모호함이 동반될 수밖에 없다.
수식이나 프로그래밍 언어와 같은 형식 언어는 비교적 논리적 구조가 정교하게 짜여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그런 종류의 언어로는 나타내고 다룰 수 있는 개념이 매우 한정되어 버린다.
수식으로 어떻게 '사랑'이라는 개념을 표현하고, 프로그램이 언어로 어떻게 '죽음'이라는 개념을 나타낼 수 있을까?
형식 언어로 복잡한 정리를 증명하는 일은 할 수 있지만, 로맨스 소설을 쓸 수는 없다.
이러한 언어의 한계도 역시 P2의 가정을 뒷받침한다.
예를 들어 오늘 코스피가 3% 하락했다고 한다면 이는 사실이고, 이에 대한 이유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혹은 연준의 테이퍼링 가속화는 객관이다. 그러나 코스피가 하락했거나 1%만 상승했다고 하는 것은 명백한 모순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제한된 영역 안에서 객관성을 추구할 수 있으며 (P3), 실재에 대한 그림을 그려 볼 수 있다.
비록 그것은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고 그리는 것과 같은 불완전한 그림이겠지만,
완전한 허구와는 분명히 구분되는 것이다.
결론
위의 3가지 가정 중 문제의식에 대한 해결방안으로
P2 ("그러나 객관적인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결코 완벽할 수 없다")에 무게를 두기로 했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완벽하지 않은 존재"이지만, 인간은 P3에서 말하는 '제한적인 범위' 내에서
최대한 합의점에 도달하고자 노력한다고 생각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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